아이 게임 통제 (자기조절력, 외적통제, 보드게임)

아이가 게임을 못 하게 막을수록 아이는 더 영리하게 뚫습니다. 폴더폰을 쥐어줬더니 유심을 옮겨 꽂고, 컴퓨터 비밀번호는 명령어로 우회했다는 이야기를 처음 접했을 때 저는 솔직히 피식 웃으면서도 뭔가 뜨끔했습니다. 방과후 강사로 일하면서 초등학교 5학년 아이들을 가까이서 보다 보면, 통제가 강할수록 아이들이 더 교묘해진다는 걸 몸으로 느끼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은 게임용어와 비속어를 함께 말하며 친구들과 대화합니다. 당연히 어른들의 시각으로는 보기 좋지 않지만 아이들의 마음을 가까이에서 읽어 낸다면 아이들의 마음도 알게 될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기조절력, 통제로 키워지지 않는다

자기조절력(Self-regulation)이란 외부의 명령 없이 스스로 욕구를 조절하고 행동을 결정하는 능력입니다. 쉽게 말해 "하지 마"라는 말 없이도 스스로 멈출 수 있는 힘이죠. 일반적으로 부모가 규칙을 빡빡하게 정해주면 아이가 절제를 배운다고 알려져 있지만, 제 경험상 이건 좀 다릅니다.

방과후 수업을 마치고 중앙현관 쪽을 지나가다가 5학년 남자아이들이 모여서 대화하는 걸 우연히 들은 적이 있습니다. 한국말이긴 한국말인데, 게임 아이템 이름과 비속어가 뒤섞인 언어라 절반도 못 알아들었습니다. 처음엔 그 모습이 낯설었지만, 그게 아이들이 친구들과 소통하는 방식이라는 걸 조금씩 이해하게 됐습니다.

실제로 대학생 50여 명을 대상으로 진행된 실험에서, 강한 억제 조건을 부여받은 그룹은 자기효능감(Self-efficacy)이 낮아지고 재도전 의지도 떨어지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자기효능감이란 '나는 할 수 있다'는 자기 믿음을 뜻하는데, 이게 무너지면 공부든 게임이든 새로운 일에 도전하는 의지 자체가 약해집니다. 외적 통제(External control), 즉 부모나 외부의 강제적 규제에 의존해 행동하던 아이는 그 통제가 사라졌을 때 스스로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출처: 국립특수교육원 자기결정 연구자료)

협약서를 억지로 서명시키는 방식도 결국 같은 맥락입니다. 서명은 했지만 마음이 없으면 아이는 다음 구멍을 찾습니다. 저도 처음에는 "이 약속 안 지키면 티비랑 스마트폰 없앤다"는 방식으로 선을 그었는데, 지금 돌아보면 그게 겁을 준 건지 동기를 심어준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외적통제보다 효과 있었던 방법들

강한 외적 통제 대신 실제로 효과가 있었던 방법들을 정리해보면 이렇습니다.

  1. 아이가 보는 유튜브를 함께 시청하며 "이 말은 욕이야, 걸러서 듣자"고 자연스럽게 얘기했습니다. 금지보다 해석을 가르치는 방식이었습니다.
  2. 게임 시간을 부모가 일방적으로 정하는 대신, 아이 스스로 "두 시간이면 충분해요"라고 말하도록 유도했습니다. 제가 정한 게 아니라 아이가 정한 규칙이 되니 이행률이 달랐습니다.
  3. 온라인 게임은 아이가 잘하는 영역으로 인정하고, 저는 보드게임이라는 제가 자신 있는 판으로 아이를 끌어왔습니다. 경쟁 구도가 아니라 각자의 강점을 인정하는 방식이었습니다.
  4. 규칙을 어겼을 때의 벌칙보다 지켰을 때의 칭찬을 먼저 설계했습니다. 달성 가능한 낮은 목표를 잡아서 성공 경험을 먼저 쌓게 했습니다.

아이는 로블록스와 마인크래프트를 좋아합니다. 처음에는 저도 노트북으로 함께 접속해봤는데,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제가 너무 못해서 오히려 아이가 답답해했거든요. 그래서 온라인 게임은 아이에게 맡기고, 저는 직접 손으로 다루는 보드게임 쪽으로 방향을 틀었습니다. 이게 훨씬 현실적인 선택이었습니다.

부모의 불안이 과잉 통제로 이어진다는 분석은 저도 공감합니다. 아이가 방 안에서 혼자 뭘 보는지 모를 때의 불안감과, 거실에서 눈에 보이는 상태로 할 때의 안도감은 분명히 다릅니다. 그 불안을 줄이는 방법이 "차단"이 아니라 "함께 있음"일 수 있다는 걸, 저도 아이 유튜브를 같이 보면서 조금씩 배웠습니다.

보드게임이 채워준 것들

아이가 점점 커갈수록 몸으로 부딪히며 놀아주기가 어려워집니다. 그 빈자리를 스마트 기기가 채우는 건 솔직히 부모 편의의 측면도 있습니다. 제가 밥을 해야 한다는 이유로, 피곤하다는 이유로, 아이를 태블릿 앞에 앉혀둔 시간이 쌓였다는 걸 이번에 보드게임을 사면서 처음 제대로 인정했습니다.

이번 주말 비 예보를 보고 아이와 함께 보드게임을 고르다가 한참 실랑이를 했습니다. 아이가 좋아하는 것과 제가 재미있을 것이 달라서요. 결국 세 가지를 골랐는데, 우봉고와 할리갈리가 포함됐습니다. 우봉고(Ubongo)는 도형 퍼즐을 빠르게 맞추는 공간지각 게임으로, 아이가 학교 쉬는 시간에 친구들과도 즐긴다고 했습니다. 할리갈리(Halli Galli)는 과일 그림을 보고 종을 누르는 반응속도 게임인데, 제가 직접 해보니 예상보다 훨씬 재밌었습니다.

사회적 학습 이론(Social Learning Theory)에서는 아이가 실제 사람과 눈을 맞추고 반응을 주고받는 상호작용을 통해 사회성을 발달시킨다고 설명합니다. 쉽게 말해 화면 속 아바타가 아니라 옆에 앉은 사람의 표정을 읽으며 노는 경험이 정서 발달에 더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뜻입니다. (출처: 한국교육개발원 아동 발달 연구) 아이가 보드게임을 하면서 제 눈치를 살피고, 이겼을 때 소리를 지르고, 졌을 때 다시 하자고 조르는 모습이 온라인 게임 할 때와는 분명히 달랐습니다.

예전에 보드게임 카페가 많았던 시절이 있었는데, 요즘은 거의 사라졌습니다. 세 가지 게임을 다 하고 나서도 아이가 더 하고 싶어 했을 때, 그 절실한 눈빛을 보면서 보드게임 카페가 왜 필요한지를 온몸으로 이해했습니다. 다양한 게임을 부담 없이 경험할 수 있는 공간이 지금 아이들에게 정말 없다는 게 아쉽습니다.

게임을 하는 아이를 어떻게 볼 것인지는 결국 아이를 얼마나 믿는지의 문제인 것 같습니다. 저도 방과후 강사로 수많은 아이들을 보면서, 규칙을 잘 지키는 아이보다 스스로 결정을 내리는 아이가 훨씬 단단하다는 걸 느꼈습니다. 아이와 협약서를 다시 쓸 일이 있다면, 이번엔 아이가 먼저 초안을 쓰게 해볼 생각입니다. 그리고 이번 주말처럼 비가 오는 날엔, 일단 보드게임 박스부터 꺼내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v3m1_1AFng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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